'너희가 재즈를 아느냐?'물었을 때 얼굴 붉히며 도망갈 사람, '너희가 찰스 레이를 아느냐?' 물었을 때 '그게 누구야?'라고 반문할 사람, 누구라도 상관없다. 영화 <레이>의 OST를 들으면 "아! 이 노래~"하며 금세 친근함을 느끼게 될테니까.
전설적인 재즈의 신화 '찰스 레이'의 인생을 담은 영화 <레이>가 2월 18일 개봉한다. 재즈를 몰라, 레이를 몰라 이 영화를 지나친다면 조금 억울하다. 당신이 제목도 모르고 흥얼거렸던 그 노래가 바로 찰스 레이의 것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찰스 레이를 완벽하게 복원한 걸작 <레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명곡들을 먼저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레이>의 OST중 대표적인 4곡을 전곡듣기로 들을 수 있다. 헤드폰을 꽂고 버튼을 클릭하시라. 음악이 흐르면 눈을 감아라. 음악의 전설이 시작된다.
WHAT'D I SAY
'왓 아이 세이(What'd I Say)'는 많은 사람들이 '레이 찰스'의 대표곡으로 기억하는 1959년에 히트한 곡이다. 이 노래는 최초로 관능적인 스타일을 시도했는데 레이 찰스가 노래를 리드하면 여성 백코러스들이 교태스러운 허밍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노래를 진행했고, 레이 찰스가 전자 피아노 연주를 시도한 곡이기도 하다. 당시 이 곡은 방학 시즌을 맞이해 자유로운 기분에 젖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독히도! 관능적인 음악성 때문에 라디오에서는 방송이 금지되기도 했지만, 2003년 미국 국회 도서관에서는 미국 음악 레코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래 중의 하나로 선정하여 보관 중이다.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가 담배 연기 자욱한 재즈바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던 중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즉흥적으로 창작된 곡으로 알려져있으며, 영화 속에서 당시의 열띤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장면을 통해 경쾌하고 열정적인 공연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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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IA on MY MIND
레이 찰스의 대표곡 중 하나인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는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자 언제나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미국 조지아 주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다. 데뷔 초기부터 오랫동안 그와 함께 했던 아틀란틱 레코드사를 떠나 대형 메이저 음반사인 ABC 파라마운트로 이적한 이후 첫 곡으로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발표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60년 팝차트 1위에 등극, '레이 찰스'에게 첫 번째 그래미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후, 조지아 주와 레이는 악연의 굴레에 묶이게 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여 조지아 주 어거스타 공연을 취소한 '레이 찰스'에게 조지아 주가 평생 공연금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결국 레이가 인종의 벽을 넘어서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미국의 국민적인 음악 영웅으로 성장하자, 79년 조지아 주는 '레이 찰스'에게 공로상을 수여하고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조지아 주 공식 노래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영화 <레이>에서!
'레이'는 이 곡을 통해 기존의 R&B나 블루스의 연주 방식을 타파하고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합창단을 기용한 음악을 시도한다. 그 결과 여러 음악 장르를 오가는 '크로스오버'라는 새로운 음악의 장르가 창조되었고, 1960년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의 발표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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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 THE ROAD JACK
1961년 인기 차트에 1위를 차지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노래로 그의 백 코러스들 중 '레이'에게 제발 떠나달라는 가사를 애원하듯 노래했던 마지 헨드릭스를 세상에 알리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레이>에서!
달콤한 여성 코러스를 찾던 '레이 찰스'는 여성그룹 '쿠키스'를 오디션하고 단 번에 그들과 함께 순회 공연을 계약한다. 이들은 '레이 찰스'의 백 코러스를 맡는 '레이걸'이 되는데, 레이는 이 세 명의 여성 보컬 중 한 명인 '마지 헨드릭스'와 애정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아내가 있는 레이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마지의 관계는 갈등의 연속에 놓이게 된다. 결국 마지는 임신한 아이의 출산을 원치 않는 레이에 대해 분노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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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HAIN MY HEART
짝사랑하는 마음을 알아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남자의 마음을 노래한 펑키풍의 정열적인 노래 '언체인드 마이 하트'는 레이 찰스의 열정과 라틴리듬의 화려한 어울림이 매력적인 곡이다.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가 공연 중에 이 곡을 부를 때, 관객들은 흥분하며 무대 위로 뛰어오른다. 레이 찰스는 무대위 관객들을 저지하지 않고 열광하는 관객들과 하나가 되어 이 정열적인 노래를 열창한다.
음원제공 : UIP Korea |
레이찰스는, 이렇습니다.
프로필 이름 : 레이 찰스 본명 : Ray Charles Robinson 직업 : 가수·피아니스트·색소폰 연주자·가곡 작가. 수상경력 : 1960년 최우수 R&B상 2005년 그래미상 - 올해의 레코드상 주요작품 : 《What I say》, 《할레루야, 그녀를 사랑하리》, 《사랑할 수밖에 없어》 사망 : 2004년 6월 10일 간질환 합병증으로 사망
인물소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각장애인으로 일컬어지는 흑인 소울 가수 레이찰스. 그는 그래미상을 다수 수상한 R&B 음악의 거장이다. 대공황 시대인 1930년 9월 23일 미국의 남부지역 조지아주(州) 알바니에서 태어났다. 교회의 찬송가와 세 살 때 이웃집 카페 주인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뒷마당 풀장 안에서 놀고 있던 네 살짜리 동생은 순식간에 물에 잠겨 나오질 않았다. 놀란 소년이 어쩔 줄 모르며 엄마에게 뛰어갔을 때 동생은 튜브로 만든 조그만 풀장 안에서 익사했다. 형이라고는 해도 고작 한 살 위인 다섯 살에 불과했던 소년은 동생이 물에 빠져 죽는데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적인 경험을 한 이후 이때 생긴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한, 그리고 예민한 청각은 이후 그의 음악과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의사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아이가 곧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선고했다. 어머니는 영원한 암흑 속을 헤매게 될 아들의 미래를 대비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물건들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인한 어머니는 아들의 홀로서기를 위해 청각을 개발하는데 집중을 했으며 아들은 시각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갈 준비를 하며 일곱 살 때 소년은 결국 완전히 실명했다. 성 어커스틴 장애아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피아노반의 정원 초과로 클라리넷반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그때 클래식과 컨트리 뮤직, 재즈와 가스펠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의 음악 작업을 변절이라고 불렀지만 레이 찰스는 이때부터 모든 음악이 자신의 뿌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대공황기 플로리다주 흑인 빈민촌에서 자란 레이 찰스는 참으로 처참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수리공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공장 잡역부로 일했던 어머니마저 사고로 잃으면서 소년은 15세에 천애 고아가 됐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15세 이후로는 한 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레이 찰스는 블루스 밴드를 따라 투어를 다니며 미국 전역을 방랑했다. 밴드에서 배운 음악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초월했다. 알토 색소폰, 트럼펫, 클라리넷, 오르간 등에 손을 대며 악기마다의 테크닉과 관련 곡들을 섭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혀가며 18세에 드디어 연주자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됐다. 그때 본명 레이 찰스 로빈슨에서 로빈슨이라는 성을 떼어냈다. 사람들이 자신을 당시 유명했던 프로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과 혼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미국 전역을 피아노를 벗삼아 방랑하며 소울 가수로서의 명성을 쌓아왔다. 탁월한 음악적 감각과 한이 녹아 든 깊고 따뜻한 목소리는 이후 솔과 컨트리, 웨스턴, 재즈,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인정을 받는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흑인이며 맹인이었던 레이 찰스는 암흑 속에서 음악이라는 자신만의 빛을 찾아낸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많은 이들이 레이 찰스를 존경했다. 그가 흑인과 맹인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아티스트는 레이 찰스 말고도 존재했다. 수십 년간 미국 연예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레이 찰스는 미국 음악계에서 누구보다도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와도 구분된다. 흑인들의 희로애락을 대변했던 소울 뮤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업적은 레이 찰스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리듬 앤드 블루스를 가스펠과 결합시켜 소울 뮤직의 혁신을 꾀한 그의 대담함은 확실히 남달랐다. 1950년대 히트곡인 'I’ve Got a Woman'과 'What'd I Say'는 그야말로 화끈했다. 이 곡들은 얌전한 신도들이 얼굴을 붉히며 들고 일어날 만큼 리듬과 가사에서 교회 음악의 전통과 형식을 파괴하며 소울 음악의 효시로 자리 잡았다. 레이 찰스는 험난했던 자기 삶의 모든 순간을 음악에 담으며 즐겼다. 1960년대 스타의 반열에 올라 전성기를 열어간 이후로도 그가 만들어낸 팝 음악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숱하게 많다. 1962년 레이 찰스는 백인 가수들의 전유물이던 컨트리와 웨스턴을 새롭게 해석한 앨범 ‘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을 발표하며 자신의 명성을 시험대에 올렸다. 흑인 가수가 컨트리 음악을 리메이크하다니. 장르는 구분돼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은 물론 그의 팬들과 안티팬들까지 모두 분노했다. 음악 관계자들은 “무리하고 유치한 시도”라고 질타했다. 주변에선 레이 찰스의 리듬 앤드 블루스 팬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당시 1백만 장이 넘게 팔리는 히트 앨범이 됐다. 앨범의 대표곡 ‘I Can’t Stop Loving You’는 라디오를 틀 때마다 울려나왔다. 7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60년간 음악 활동을 했다. 50년간 각종 음악 차트의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250번에 이르는 레코딩 작업을 했다. 레이 찰스는 '소울 음악의 대부'였고, 영혼의 목소리를 지녔던 기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평생 받은 그래미 트로피만 13개에 이르며 베스트 셀링 차트에는 76개의 싱글 앨범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미 많이 알려진 레이찰스의 일생을 다룬 영화, '레이'가 한때 주목을 받았었죠. 극중 '레이'역할은 제이미 폭스가 맞아 열연을 하고 연기상까지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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