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이야기/사찰사진

두륜산 대흥사, 달마산 미황사

일하는 사람 2009. 12. 20. 13:20

 

 

산문은 안에 있지만 절 이야기 하면서 현판이 안보이니 서운해서 앞으로 옮겨 놨어요.

 

 

대흥사 들어가는 길은 피안교를 넘어서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언덕인 사바세계의 욕망을 넘어서 진리의 세계인 저언덕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바로 피안교입니다.

 

 

대흥사 들어가는 숲의 길목에 서 있는 두륜산 대흥사 돌기둥

 

 

두륜산 대흥사 산문

 

 

산문을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으로 담장을 친 곳이 바로 두륜산 대흥사의 부도림이군요. 조선 후기에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 의발을 이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들의 부도들이 모셔져있습니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보현사에 계시다가 입적하시면서 자신의 의발을 두륜산 대흥사에 모시라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에 따라 제자들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비로서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지요. 이것이 바로 서산대사의 부도입니다.  청허당이라고 쓰여 있지요.

 

 

우리나라 차를 말할 때 꼭 이야기 되는 초의선사 부도입니다.

 

 

부도비의 귀부 거북이 인데요. 참 어수룩하면서도 정감있게 생겼네요.

 

 

부도에 새겨져 있는 연꽃문양, 조선 중기는 불교가 탄압을 많이 받았던 시절이고, 이 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많이 어려웠던 시절이라서 큰 스님들의 부도도 상당히 검소하고 수수하게 만들어져 있군요.

 

 

대흥사 해탈문인데 산문처럼 현판을 달아 놨네요.

 

 

해탈문 현판은 안에다가 걸어 놨네요.

 

 

문 양쪽으로 문수, 보현 두 동자를 모셨는데 모습은 같으며, 청사자와 백상을 타고 있네요.

 

 

해탈문 들어서자 마자 무염지가 반기는 군요.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시면서 유명해 졌지요. 성보박물관에 모셔 놓은 금란가사

 

 

불교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하는 것을 의발을 전한다고 합니다. 즉 옷(가사)과 밥그릇을 전한다는 말이지요. 불교집안에서는 개인적인 사물을 많이 지니고 다니지 않고 부처님 당시에는 가사와 발우(밥그릇) 그리고 부란약(조잡하게 만든 비상약) 정도 밖에 지니지 않기 때문에 의발을 전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전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서산대사께서 신으시던 신발 : 귀한 것이야 많이 보관들 하지만 신발은 잘 보관하는 경우가 드물지요. 400년전 신발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표충사 현판은 정조대왕께서 내리신 어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표충사가 국가에서 인정한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이었습니다.

 

 

 

표충사 안에는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세분의 진영을 모시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청허당 휴정(서산), 사명당 유정, 뇌묵당 영규대사의 세분입니다. 이 서산대사의 진영 왼쪽 위에 보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표충사 왼쪽 옆 조사전에는 대흥사 출신은 큰 스님들 진영이 모셔져 있군요. 위쪽 가운데가 전설에 따라서 창건주인 아도화상이고 오른쪽이 편양 언기스님이고 왼쪽은 소요 태능스님으로 서산대사 문중에서 가장 후손이 번창한 두분으로 이곳 대흥사에 같이 모여 살면서 후인을 키우신 분들이다.

 

대광명전은 추사의 제자들이 초의선사와 힘을 합쳐서 60세를 맞이 하는 스승 추사의 제주도 귀양이 빨리 풀리고 앞날에 광명이 비추기를 기원하면서 만들 전각입니다.  현재는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새로이 문수전과 보현전을 신축했군요. 문수전 뒤에 있는 부처님 오신날 제등행렬 때 쓰였던 보살등이 있어서 한컷 찍어봤습니다.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가허루라고 되어있네요. 허공을 올라탄다고 하니 참 시적인 표현이지요. 호남의 명필로 유명했던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입니다.

 

 

천불전의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로서 토속적인 글씨인 동국진체를 쓰던 원교 이광사 선생의 글씨입니다. 중국의 고전에 의거해 글씨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추사선생과는 대립되시던 분이지요.

 

 

천불전의 불상들은 경주의 옥돌을 가지고 석공 10사람이 6년에 걸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배로 나르다가 한척이 일본에 표류하였는데, 일본사람들이 모시려고하자 꿈속에서 부처님이 해남 대둔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여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돌아온 불상에는 어깨나 좌대에 일(日)자를 써 넣어 표시를 했다고 하며 이를 가리기 위해서 모든 부처님께 가사를 입혔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에 가사를 입히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물을 건너면 있는 침계루 건물입니다. 이 침계루 현판도 원교 이광사 글씨로 구불구불 물이 흐르듯 아주 멋지게 쓴 글씨인데 등에 가려서 못 올리는게 아쉽군요.

 

 

대흥사의 대웅보전에 있는 용들은 제 각기 보는 곳이 다 다르군요.

 

 

대웅보전 글씨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갈 때 초의선사를 만나려고 이곳에 들렸다가 이 현판을 보고 당장 떼리고 했다가, 귀양 끝나고 오는길에는 다시 찾아서 걸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하지요.

 

 

대웅보전의 본존불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대웅보전 벽화중 천장, 지장, 지지보살을 그린 벽화

 

 

대웅전의 용머리 들보와 하늘을 나는 봉황을 탄 동자 조각

 

 

대웅보전 계단의 소맷돌

 

 

대웅전 앞 기단모서리의 석수

 

 

대흥사 백설당에 걸려 있던 무량수각 현판 (추사 김정희 글씨)입니다. 현재 백설당 건물은 공사가 진행 중이며 응진전 오른쪽으로 새로 만든 건물에 백설당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대흥사 응진전앞삼층석탑 (보물 320호)

 

 

응진전 16나한 중의 일부분

 

 

응진전 동자상

 

 

응진전이라서 당연히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보살이 모셔진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옆의 위패에는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되어있네요. 반대편 위패에는 나무대세지보살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대흥사의 산신령 할아버지신데 선비들의 영향을 받으셔서 정자관을 쓰셨네요. 경상에는 책들도 보이고.. 산신령 할아버지의 자유롭고 유유자적한 분위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산신각 천정에 용그림과 함께 그려져 있는 별자리 모양

 

 

백설당 현판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 입니다.

 

 

여기는 땅끝에 있는 달마산 미황사 전경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거의 못찍었네요.

 

 

미황사 대웅전 공포부분, 대웅전에 단청만 하면 불이난다고 하네요. 3번의 화재끝에 더 이상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웅전 기둥 주춧돌 위를 기어다니고 있는 게

 

 

달마산 미황사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아미타불

 

 

미황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상 앞 명패 : 제가 미황사에서 찍은 사진이 좀 모자라서 같이 대전충청포교사단 사찰문화해설팀에 있으신 안재봉 포교사님 사진을 좀 사용합니다.

 

 

대웅전 불상 앞 가운데 있는 해가 뜨는 모양의 장엄물 :안재봉 포교사님 사진

 

 

대웅전 닫집과 천정의 범자 무늬

 

 

대웅전의 들보에 그려진 불상

 

 

미황사 명부전의 시왕 일부

 

 

미황사 명부전의 역사상

 

 

미황사 루각 1층 천정의 주악비천상 :안재봉 포교사 사진

 

 

미황사 누락 1층 천정 부분의 공양비천상 :안재봉 포교사 사진

 

 

미황사 응진전 : 안재봉 포교사 사진

 

 

미황사 삼성각의 독성탱화 중에서 일부 : 참 모란이 화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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