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이야기/사찰사진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

일하는 사람 2018. 5. 30. 14:04


구미 해평 도리사(桃李寺)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도리사에 있는 조선 후기 불전.

[개설]
도리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440년(눌지왕 24)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고 있음을 보고 절을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위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도리사로 526] 도리사 경내에 위치하며

 태조산(太祖山)을 배경으로 도리사 우측 끝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변천]
도리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최초의 절이라 하며 원래의 절터는 태조산(太祖山) 기슭에 있는 옛 절터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반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1677년(숙종 3)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1729년(영조 5) 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하여 인근의 금당암(金堂庵)으로 옮겨 봉안하고 도리사로 개칭하였다.

전내 본건물의 중수(重修)·단청(丹靑)에 관계된 현판을 보면

「강우선산부동태조산도리사금당암중수기(江右善山府東太祖山桃李寺金堂庵重修記)」

 말미(末尾)에 ‘가경십이년무진팔월일(嘉慶十二年戊辰八月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1807년(순조 7)에 해당된다. 1823년(순조 23)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했다.

1876년(고종 13) 극락전을 중건하고 1922년 칠성각을 건립했다.

「선산도리사법당중수기(善山桃李寺法堂重修記)」에는 ‘대청광서이년병자(大淸光緖二年丙子)’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876년(고종 13)이다. 「도리사중창기(桃李寺重創記)」에는

 ‘불기이구오구년신미양월하완(佛紀二九五九年辛未陽月下浣)’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930년에 해당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약 70년 간격으로 중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주변에는 태조선원(太祖禪院)·삼성각·조사전·요사채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조사전 좌측 높은 곳에는 1977년 해체 복원한 사리탑과 적멸보궁이 배치되어 있다.

 화강석 가구식 기단 위에 넓고 큰 막돌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했다.

 벽체를 모두 판벽으로 구성하고 바깥 벽면에는 벽화를 그렸다.

간살이 넓은 어칸에는 4분합 굽널띠살문을 달고 간살이 좁은 양 퇴칸에는 같은 모습의 2분합 굽널띠살문을 달았다.

좌측면 건물 앞쪽 칸에는 외짝문을, 배면에는 어칸에 두짝문을 설치했는데 이 문들 역시 정면의 것과 동일한 형식이다.

공포는 다포계형식으로 어칸에는 간포(間包)를 둘, 퇴칸에는 하나를 놓고 외부는 3출목, 내부는 4출목으로 꾸몄다.

외부 살미는 휘어 오른 3개의 앙서[仰舌]와 1개의 수서[(垂舌]로 이루어져 있다.

앙서 윗면에는 연화 및 연봉각으로 장식하고 간포의 수서 위에는 출목도리와 장혀에 끼운 봉두를 얹어 놓았다

. 내부 운궁 밑면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연화 1개와 연봉 4개가 차례로 장식되어 있다.

 겹처마 팔작으로 구성된 지붕부는 용마루 양단을 치미로 장식하고 네 귀의 추녀를 활주로 받쳐 놓았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 뒷부분에는 내진주를 세우고 후불벽을 설치했다.

후불벽 앞에 불단을 앉히고 불벽에는 큰 탱화를 걸고 그 위쪽에는 닫집을 시설하였다.

 상부 대량 위에는 용두로 조각된 양쪽 측면보의 머리가 걸쳐 있고 그 상부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며져 있다.

 건물 외부는 금단청이고 내부는 모로단청이다.

[현황]
현재는 도리사의 본당의 기능을 하고 있으나 원래는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이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법당 내에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법당의 판벽에 그려진 벽화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구미 도리사 극락전의 조성연대는 「도리사금당암중창기」(1870), 「선산도리사법당중수기」

(1876) 등으로 보아 19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단청은 모두 잘 되어 분위기는 밝고 경쾌하며 아담한 편이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평방·주두를 안팎으로 감싸고 있는 안초공이 있고

 네모서리 기둥의 창방 뻘목과 귀한대 하부에는 보기 드문 파련각한 낙양이 있는데

 이런 공포형식은 대체로 조선 후기 모습으로 1870년대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과 유사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라시대 최초의 사찰, 도리사를 찾아서....

지난 해 3월 첫주의 주말에 경북 구미시(옛 선산군)의 도리사(桃李寺)를 찾아 갔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도리사라는 사찰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식사 후 곧장 차를 몰았습니다.

(당시 제 카메라가 입원 중이어서 다른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가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야 그 메모리 카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사진 파일을 발견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까지 낀 좋지 않은 날씨였지만,

언제 또 올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20km 채 안되는 거리를 한 달음으로 달려 갔습니다.
구미에서 상주로 가는 지방도로를 한참 달려가다 보니 도리사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거기서 도리사 방향으로 접어드니 큰길에 도리사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나더군요.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海東最初伽藍聖地 太祖山 桃李寺)’라는 현판이 걸린일주문은
 양쪽에 우람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장대한 모양을뽐내고 있었습니다.
1993년에 세웠다고 하니, 문화재로서의 가치야 볼 것도 없지만대로 중간에 이처럼
 거대한 일주문이 서 있다면 과연 도리사가 얼마나 규모가클 것인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더라구요.
그러나 이곳에서 도리사까지의 거리는 4km가 넘었습니다. 일주문이 본 사찰과 이처럼멀리 떨어져 있는 절은 제 기억으로는 처음인 듯 합니다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라는 일주문 현판에서도 드러나는 내용이지만,
적멸보궁 도리사는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화상이 아직
불교가 전래되지 아니한 신라에 와서 포교를 위해 처음으로 세운 사찰입니다.
그러니 해동(海東) 최초는 몰라도, 신라 불교의 발상지임에는 틀림없을 듯 합니다
차로 산길을 한참 올라가다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서도 여전히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걸어 올라야 합니다.
주차장이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를 이용해서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정자가 서 있었습니다.
정자에 잠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숨을 돌리며 도리사의 유래를 살펴 보았습니다.
한국불교의 전교는 해동불교(海東佛敎)의 초전지(初傳地)인 선산(구미)의도리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묵호자(墨胡子)로도 알려진 아도화상(阿度和尙)은 원래 고구려 사람이나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을 받기
 100여 년 전인 눌지왕 당시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일선군(선산)에와, 모례장자(毛禮長者)의 집에 은거하였는데,
 어느 날 선산의 도개(桃開) 지역에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눈속에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가 길지라 생각하여 절을창건(創建)했으니, 이 절이 곧 해동최초가람(海東最初伽藍)인 도리사라는 것입니다.
도리사라는 이름은 복숭아 도(桃)와 오얏 리(李)에서 떤 것이라 합니다.
지금까지도 인근 도개(桃開) 지역에는 아도화상이 포교(布敎)의 기반으로 삼았던
모례장자의 유허지와 우물터가 남아 있다니 결코 헛된 얘기는 아닌듯 합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도리사 경내로 들어 섭니다.
 이곳에는어느 절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사천왕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대신 정면으로 눈 앞을 막아서는 건 설선당(說禪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2층 한옥,
그리고 오른쪽을 가리고 서 있는 수선료(修善寮)라는 이름의 2층 건물입니다.

정면의 거대한 건물 1층에는 보은당(報恩堂), 2층 추녀 아래에는 설선당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이 건물은 1층은 죽은 이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고,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며, 각종 법회와 종교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합니다.

수선료는 이름 그대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인 듯 한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역시 제법 규모가 있는 팔작지붕의 2층 건물입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날아갈 듯한 누각이 나타나곤 하는 여느 절집들의 구조와는
판이하게, 근래에 신축한 거대한 건물들의 벽(壁)을 마주하고 당혹스런 느낌을 갖게되는 건
 저만의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크고 새로운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해동불교 초전지'라는 역사적인 의미와는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분위기죠.그러나 곧 저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설선당의 맞은편, 산으로 올라가는 길 한쪽으로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한 채 서 있습니다. '반야쉼터'라는, 널찍한 데크가 달린 찻집입니다.
저처럼 마음 허전한 사람들이 차 한잔 마시며 마음 달래라는 뜻인 듯 합니다.
수선료 좌측으로 난, 30 단 남짓한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절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담한 단층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태조선원(太祖禪院)입니다.
태조선원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선방으로 정면 7칸, 측면 8칸에 50평 규모의
'ㄷ'자형 건물인데, 과거 도리사가 선원을 제대로 운영하던 시절에는 선객들 사이에서
'해동제일도리사'(海東第一桃李寺)라 부를 정도로 이름난 선방(禪房)이었다 합니다.
성철(性徹) 큰스님도 이곳에서 정진하였다고 하네요.
태조선원의 현판은 3.1 운동 당시 33인의 한 분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글씨입니다.
오세창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예서와 전서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였다고 하네요.
태조선원 오른쪽으로, 높다란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진 극락전(極樂殿)은 15 평 규모,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係) 팔작지붕 건물로 도리사의 중심 불전에
해당하는데, 17 세기에 건립되었고 고종 12년(1875년)에 용해화상(龍海和尙)이
중수(重修)하고 이듬 해에 단청을 올렸다고 합니다,
 뒤늦게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46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도리사의 중심 불전임에도 후대에 건립된 수선당이나 설선당의 규모에 눌려
구석으로 밀려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극락전 안에는 극락전 창건과 함께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과
고종13년 (1876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정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밖에도
신중정화와 지장보살화가 안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향나무로 만들었고, 표면에 금칠을 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목불의 양식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입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4호 입니다
극락전 앞 마당 한쪽으로는 도리사 석탑이 서 있는데, 이 탑은 높이가 4.5m로
도리사에서는 '화엄석탑'이라 부르는 고려석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이와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탑은 얕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여러 개의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었으며,
판석으로 갑석을 덮고 갑석 위에 방형의 작은 석재를 3층으로 쌓아 탑신을 만든 다음,
맨 위층 정상부에는 노반을 두고 그 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올렸습니다.
보물 제 4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극락전 뒷편 공간에는 도리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 서 있습니다.
 이 사리탑은원래는 삼성각 북쪽 담장 밖에 있었는데, 1977년 칠성각 옆으로 이건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새로 기단석과 난간을 만들고 앞면 좌우에 석등(石燈)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세존사리탑은 석종형(石鐘型) 의 부도(浮屠)로서 전체 높이는 1.62m, 탑신의
높이는 1.02m, 지대석의 폭은 1.3m 입니다. 이 탑을 이건할 때 탑신 밑에서
'금동육각사리함'과 사리 1개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때 출토된 사리는 새로
적멸보궁과 사리탑을 지어 안치하였고,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직지사 성보박불관에 위탁 보관중이라 합니다.
절의 동북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3칸 측면1칸의 7평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안에는 삼성 즉, 즉 칠성,독성,산신의 탱화를 걸어놓고 있습니다,
설선당 뒷편의 가파른 계단 길 위로 높다랗게 올라 앉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로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1977년, 절의 동쪽에 있던 석종형 부도(浮屠)인 세존사리탑을 경내로 이건하던 중
금동육각사리함(국보제208호)과 함께 수정처럼 맑은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합니다.

이에 당시의 주지인 법등화상(法燈和尙)은 이 사리를 영구히 안치하기 위해
적멸보궁을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크고 화려한 느낌입니다.
외양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한국 종교의 문제점을 여기서도 보는 듯 합니다.
해인도는 화염경을 210자로 축약하여 거대한 화강석판에 새겼습니다.
팔정법도(八正法圖)는 거대한 화강석판에 바퀴(輪)을 새기고, 바퀴의 축 사이에
정정(正定),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등 인간이 지니고 살아야 할 여덟 가지의
바른 생활 자세를 새겨놓고, 그 아래에 해설을 붙인 비석입니다.
적멸보궁 옆 언덕에는 범종각이 있는데, 그 앞에 화강암으로 깎은 '신라의 미소'를
상징하는 커다란 '인면문원와당'이 비석 형태로 서 있습니다.
절 경내를 벗어난 동쪽 구석에 아담한 한옥 한 채가 서 있는데, 입구 쪽에"가까이 오지 마세요.
개가 뭅니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판이 있습니다.

정원에는 사나와 보이는 백구가 한 마리 있구요.지금까지 수십 군데 절을 다니며 본 가장 무시무시한 경고입니다. 나원참!
적멸보궁에서 극락전 쪽으로 가는 길에는 아도화상의 청동좌상이 있습니다.
극락전 맞은 편에 절 밖으로 나가는 작은 돌문이 있는데, 그 돌문을 통과하여아래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아도화상이 참선했다는 '좌선대'(座禪臺)가
나타납니다. 네 개의 자연석 위에다 방석처럼 다듬은 큰 바위를 얹은 자리입니다.
수 많은 날들을 이곳에 올라앉았던 아도화상은 무엇을 빌고 또 빌었을까요.
좌선대 뒷편으로는 아도화상 사적비(阿道和尙 事蹟碑) 와 함께 도리사에 시주한
사람들과 논, 밭의 면적을 기록해 놓은 불량답시주질비(桃李寺佛糧畓施主秩碑)가
있습니다. 조선 효종 때에 세워진 이 사적비에는 아도의 일생과 불교를 전파한 내용
,도리사를 지은 과정, 뒷면에는 자운비(慈雲碑)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도리사의 가장 서쪽 끝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을
100여 m 따라 올라가면 바위 언덕 위에 유리로 둘러막은 작은 정자가 나타납니다.
이 정자의 이름은 서대(西臺)인데, 옛날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이곳에 올라서서
 '손가락을 뻗어 곧게 가리킨'(直指) 곳에 '직지사'의 터를잡았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입니다.
서대 옆에 올라 서서보니 비가 오고 날이 흐려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
낙동강 줄기와 금오산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이곳은 석양이 참 아름다울 것 같네요
.아도화상이 이 경치에 반해서 도리사를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절 구경을 끝내고 다시 한번 도리사의 안내판 앞에 서서 절의 구도를 바라보니
저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그래도 한가닥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래된 극락전을 비롯하여,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기에 지어진 설선당과 수선료,
태조선원, 그리고 적멸보궁 등 다수의 건물들이 있지만 해남의 '미황사'나,
대화재 이후 새롭게 복원된 속초 '낙산사'처럼 절집이 지니는 의미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건축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도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인데 그에 걸맞는 절집이 되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서대까지 들러보고 예전 아도화상은 어떠한 마음으로 이 험준한 산속에 도리사를
지었을까를 생각하며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나무에 박아놓은 예쁜 팻말이 보이네요.
 바로 지금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미래를 향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려 한다면 바로 지금 행복하라."

그렇습니다. 지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돈이 더 생기고,
지위가 좀 올라간다고 해서 미래에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은 메시지가 그 어떤 법문보다도 더 강렬하게 가슴을 울립니다. (끝)
편집 야호사랑 구미사랑 -운영자-
[출처] 해동불교의 발상지 구미 도리사|작성자 hansongp


'佛敎 이야기 > 사찰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미 금오산 법성사  (0) 2011.05.12
설악산 신흥사  (0) 2011.01.28
구미 금강사  (0) 2010.09.26
해평 도리사 가는 길('10. 9.26 )  (0) 2010.09.26
삼각산 도선사   (0) 201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