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Brel(쟉크 브렐르)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Saint-Viateur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그는 그리 착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과 머나먼 세계를 꿈꾸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학업에 의해 점차로 그것들을 잊는다. Jacques의 아버지는 20여년의 세월을 콩고에서 보낸 후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듯이 카톨릭계인 Saint-Louis학교로 진학하였지만,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등생에 속하게 된다. 이 당시에Stevenson, Melville, London, Conrad, Jules Verne등의 소설을 애독하며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교사가 바로 Deschamps사제이다. 그는 Jacques를 열등생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수학등을 가르친다. 1944년 봄에 Jacques는 그의 친구와 함께 사설극단에 들어가는데.. 이때 그들의 계획에 도움을 준것도 바로 Deschamps사제이다. 이것이 Jacques의 연극경력의 시발점이다. 이로써 Jacques의 아버지는 18살짜리 아들의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후에 Brassen이 "사제 Brel"이란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도 바로 아버지와 카톨릭의 영향아래 성장한 탓이다 일년동안 Jacques는 모든 노력을 다하며 노력하지만, 서서히 연극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1947년 12월에 당시 젊은층의 운동인 la Franche Cordee의 주창자인 Hector와 Jeanne Bruyndonckx를 만난다. 이 모임은 그의 모랄과 감성에 맞았고 여기서 그는 첫번째 노래를 작곡하게 되고 부르게 되며, 미래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또한 그의 노래가사가 대부분 반은 시적이고 반은 철학적인 것도 이 모임에서의 영향이었다. 1950년 Jacques는 Miche Michielsen과 결혼해서 1951년 첫째딸 Chantal을 53년 둘째딸인 France를 그리고 나중에 둘째부인으로부터 58년 Isabelle을 낳는다 1952년 Jacques는 la Franche Cordee의 동료들과 같이 어울리며 자주 노래를 불렀는데. Jacques는 브뤼셀에 있는 흑장미 카바레의 주인 Louis Laydu와 친하게 지냈고, Laydu에게 그가 작곡한 노래를 자주 보여줬다. 마지막곡은 제법 쓸만했고 여기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경력을 쌓는다. 이후로 Jacques는 자주 Paris로 가서 오디션에 응했고 여러번 떨어진다. 1953년 Jacques Canetti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파리의 Trois Baudets에 있는 Canetti의 극장에서 데뷰한다. 1954년Canetti와 손 잡고 첫번째 앨범을 낸다. 이 당시에 Brel의 노래는 약간 어두운 느낌이 있었고, 이 분위기에서 탈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그에게 Clark Gable과 같은 멋진 콧수염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 점차 Jacques는 6~7군데의 카바레를 돌며 3~4곡의 노래를 부를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의 성공이 Jacques로 하여금 그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그는 가족소유의 공장을 떠나 파리에 자리잡는다. 한편 첫번째 음반의 성공으로 그는 Sidney Bechet, Dario Moreno, Philippe Clay, Catherine Sauvage, Poiret et Serrault, Raymond Devos처럼 지방의 유력한 예술가로 자리잡는다. 55년도는 그에게 JOJO라 불리는 Georges Pasquier와 만나는 커다란 행운을 준 한 해였다. Jojo는 Jacques와 떨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된다.Cannetti에 의해 기획되었던 56년 7월의 Grenoble공연에서 이제 막 알제리에서 돌아온 젊은 피아니스트인 Francois Rauber를 만났고 이 둘은 금방 친해져서 둘이서 자동차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Rauber는 계속 Jacques의 작곡을 돕는다. 한편 Canetti는 25cm음반 시장을 점령해 나갔는데... 그는 57년 Charles Cros Academie에서 "Quand on a que l'amour로 그랑프리를 획득한다. 1958년에 Philips는 세번째 앨범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그의 노래는 계속 성공한다. 특히 ne me quitte pas는 잊지못할 불후의 명곡으로 남는다. 공연도 계속 성공적이어서 한 해에 300여 회의 공연을 했던 해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테스트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모든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꿈의 무대라 할 l'Olympia에서 의 공연으로 1961년 10월에 있었다. 이때에 Edith Piaf가 Jacques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것이다. 왜냐하면 샹송은 그에게 있어 삶의 이유이기 대문이다' 라고 말했다 한다. 당연히 음악은 그에게 전부이었으므로 그는 성공한다. 1964년은 그에게 기록할만한 한해였는데... 그의 부모가 사라졌다. 또한 이 해에 l'Olympia에서의 대성공을 기록한 해였다. 모든 관객이 서서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 공연에서 Brel은 관객앞에서 Amsterdam을 즉석에서 만들어내서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이때의 실황앨범 'l'Olympia 64'는 그해의 앨범상을 수상했고, Brel 자신은 최고가수상을 수상한다. 68년말에 그의 마지막 Album을 발표한다. 이 l'homme de la Mancha는 마치 그의 인생을 옮겨 적은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가수도 코메디언도 아니었다.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주 그렇게 이야기하곤했다. 그는 어린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비행기와 배에 전념한다. 1973년에는 두달여정의 대서양항해를 떠나기도 했다. 74년에 요트를 사고 그 배로 멀고도 어려운 태평양항해에 나선다. 타히티 근처에 까지 가서 Hiva Oa에 있는 고갱이 묻혀있는 묘지 근처에 집을 빌려서 산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로운 앨범을 기다리고 있었고 드디어 1977년 가을에 Jacques는 새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 그는 녹음을 위해 폴리네시아에서 나와 작업을 마치고 다시 되돌아 가곤 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점차로 약해져서 섬에서 나오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1978년 10월 9일: 일생의 막을 내리다. 위대한 예술가는 또다른 위대한 예술가 - 머나먼 지구끝에서 빛에 칼라를 입히던 고갱을 만나러 떠났다. 고갱이 묻혔던 것처럼 Atuona 에 안장하다. |
'音樂 > 샹송&파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샹송 [chanson] 모음 (0) | 2009.12.19 |
---|---|
Kennedy Rose (0) | 2009.12.19 |
Los De Nadau - Monsur Lo Regent (1975) 앨범 中 (0) | 2009.12.19 |
Eres Tu (그것은 바로 당신) / Mocedades (0) | 2009.12.19 |
L'aquoiboniste (별난 사람) -Jane Birkin (0) | 2009.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