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She Is Michelle
02. Europa
03. Samba Pa Ti
04. Cubano Chant
05. Trumpet Fantasy
06. Behind The Rain


아르헨티나 출신 테너 섹소폰 주자 가토 바르비에리(Gato Barbieri)는 남아메리카 전통 음악을 재즈에 접목 시킨 연주인이다. 지금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칭송되는 (1973-1974)는 페루와 칠레, 아르헨티나에 산재해 살고 있던 원주민(인디오)들의 음악을 재즈와 접목시킨 연주를 선보인다. 수록곡 'Encuentros'는 듣기에도 생경한 남아메리카의 전통 타악기와 관악기들이 가토의 가공할만한 테너 섹소폰 연주와 만나며 음의 장관을 연출한다. 60년대 중반, 스탄 게츠가 들고 나온 보사노바는 50년대 맘보로 대변되는 아프로-큐반 열풍 이후 두번째로 미국 주류 대중음악에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저개발국가, 이른바 개발도상국들의 음악은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주류 대중음악 시장의 기폭제 가 됐다. 이에 재즈 뮤지션들은 디지 길레스피가 들고 나온 아프로-큐반 재즈와 스탄 게츠의 보사노바를 넘어서 좀더 다양한 제 3계권 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한다. 가토 바르비에리는 앞에 언급한 재즈 뮤지션들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는 얻지 못했지만 유려한 선율과 풍성한 리듬이 압권인 라틴 아메리카의 즉흥 연주를 아프로-아메리칸의 즉흥 연주인 재즈와 비교 했을 때 전혀 손색이 없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1934년 아르헨티나 로자리오에서 태어난 가토 바르비에리는 찰리 파커의 연주에 매료되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했다. 가토는 12살 되던 해인 1946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해 지역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이미 자국에서 정상급 뮤지션 대우를 받던 중 재즈의 본고장에서 좀더 깊은 연주 세계를 경험하기 원했던 가토는 1962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고 악기도 클라리넷에서 테너 섹소폰으로 바꾼다. 가토는 유럽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은 프리 재즈 운동에 가담한다. 이후 1965년 프리/아방가르드 재즈 연주자 돈 체리(Don Cherry)의 밴드 멤버로 활동하며 가토는 마이클 만틀러, 칼라 블레이, 찰리 헤이든과 같은 프리 뮤지션들과 어울리며 유럽과 뉴욕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나간다. 칼라 블레이의 (1969) 찰리 헤이든의 (1969)와 같은 앨범에서 가토의 연주를 접할 수 있다. 그러던 중 1969년 가토는 자신의 음악 노선에 획기적인 변신를 감행한다. 프리 재즈에 천착해온 그였지만 마치 엄청난 바위산을 마주하듯 그가 펼쳐야 할 음악의 방향은 막연했다. 가토는 결국 프리 재즈 연주에 한계를 느꼈고, 이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고민하던 중 자신의 뿌리인 남아메리카, 바로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을 재즈에 접목시킬 결심을 한다. 가토가 한창 라틴 음악과 재즈의 접목을 실험해가던 1972년, '재즈 매거진'이란 잡지에 '왜 나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는가'라는 인터뷰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 음악으로 돌아간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위기에 빠졌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브라질 지휘자 글라우버 로하를 다시 만났다. 글라우버는 제 3세계 문제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저개발국가 출신이야. 하위문화에 속한다는 거지. 자네는 자네가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된 것을 해야 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 또 식민주의를 통해서 배운 것을 하려고 노력하면 안 돼. 자네 안에서 제일 진실된 것 위해서 일해야 해. 라틴 아메리카에 뿌리를 둔 것 위에서 말이야” 나는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민속 음악가들과 즐겨 연주하던 것을 레코드로 만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빌라 로보스의<브라질풍의 바흐> 어릴 때 자주 듣던 멜로디들...거기서 내 뿌리를 다시 발견했다. 복잡한 지적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뿌리. 왜 브라질에는 재즈가 없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곳의 대중음악 자체가 너무나 환상적이고 풍요롭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선 탱고와 비슷한 것, 그것이 바로 재즈였다. 이제 가토에겐 당시 젊은 재즈뮤지션들이 그토록 숭상하던 존 콜트레인이나 돈 체리와 같은 우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가토는 곧바로 테너 섹소폰을 통한 라틴 아메리카 프로젝트를 착수해 간다. 라틴 아메리카 프로젝트의 첫 작품 제목은 바로 자신의 출신이기도 한 (1969)였다. 존 콜트레인에 비견될 테너 즉흥 연주자로만 평가되길 원치 않았던 가토는 재즈와 브라질 삼바, 남아메리카의 각종 전통 음악을 혼합해 놓은 연주를 실험해 간다. 이집트의 전설의 새 이름에서 타이틀을 따온 1971년작 는 당시 한창 부상하던 재즈-록 사운드에 브라질에서 공수해온 나나 바스콘켈로스, 진 골든과 같은 전통 타악기 연주자들의 두드림을 가세시키며 재즈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하지만 가토의 명성이 전 세계에 알려진 계기는 바로 영화음악에서였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초기 역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의 스코아를 그가 담당했다. 상업영화의 메카 미국 헐리우드에선 철저히 게 무시당했지만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 사단의 전폭적인 호평에 힘입어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영화로 남는다. 음악을 담당했던 가토 역시 이에 상승효과를 얻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듬해 1973년부터 74년, 가토는 창조력은 정점의 순간을 맞는다.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통해 4장의 앨범으로 연속 발표된 '라틴 아메리카'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프리재즈, 재즈 록, 남아메리카 인디오의 민속 음악들을 한데 집결해 놓은, 그야말로 가토 음악의 완결편이었다. 12분에 달하는 서곡 'Encuentros'는 차츰차츰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청중들을 라틴의 황홀경으로 초대하는 재즈사에 길이 남을 명연이다. 그의 '라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이후 1997년 이란 2장의 CD로 재 발매된다. 갑자기 스포라이트를 받으며 바빠진 가토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척 맨지오니가 소속된 A&M에서 재즈-팝 스타일의 연주들을 발표한다. 빌보드 차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정도로 상업적 성과를 얻지만 이후 가토는 70년대 초 발했던 발군의 창조력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젊은 포스트 밥 계열 뮤지션들에게 밀려 차츰 설 자리를 잃은 가토는 80년대를 거쳐 90년대 내내 재즈계를 떠나 있었다. 그러던 중 1997년 프레이 보이 재즈 페스티벌을 통해 극적인 재기에 성공한 가토는 일흔을 앞둔 고령에 불구하고 1999년과 2002년 콜럼비아와 피크 레이블을 통해 신작을 발표한다. 작열하는 남미 재즈의 황홀경을 더 이상 그에게 기대할 순 없겠지만 가토의 연주는 80년대 팻 메시니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발흥한 에스닉 재즈 태동에 영감을 줬다는측면에서라도 평가 받아야 할 부분이다.
